4강. 세 차례 귀환(스룹바벨·에스라·느헤미야)의 연대기
이 강의는 33장 전체를 마무리하며 34-35장에서 전개될 실제 귀환 내러티브의 시간적 뼈대를 세운다. 학생은 다음을 이해하게 된다.
- 스룹바벨(주전 538년경), 에스라(전통적으로 주전 458년), 느헤미야(주전 445년)로 이어지는 세 귀환의 전통적 연대기를 페르시아 왕들의 재위와 연결하여 정리한다.
-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상대적 도착 순서에 관한 학계의 논쟁 — 전통적 견해(에스라 458년 선행)와 소수 견해("느헤미야 선행/에스라 후행" 가설) — 을 그 근거와 함께 균형 있게 이해한다.
- 이 연대기 논쟁이 본문 주해와 신학적 이해에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미치지 않는지를 분별한다.
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다스릴 때에 에스라가 있으니라
에스라 7:1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앞에 술을 드리는 자가 되었는데 ...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무슨 일로 이제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느헤미야 2:1-2
일찍이 하나니와 몇 사람이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들에게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유다 사람 곧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의 형편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느헤미야 1:2-3
1. 세 귀환의 전통적 뼈대
에스라-느헤미야서와 학개·스가랴서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세 차례의 귀환 흐름이 확인된다.
1차 귀환(스룹바벨, 주전 538년경): 고레스 원년(주전 539/538년) 칙령 직후, 스룹바벨(다윗 왕조의 후손, 여호야긴의 손자)과 대 예수아(여호수아)의 인솔 하에 약 5만 명(스 2:64-65의 총계, 개별 항목 합산과의 불일치는 34장 1강에서 다룬다)이 귀환했다. 이들은 재건을 시작했으나(스 3장) 대적들의 방해로 중단되었다가(스 4장), 학개·스가랴의 격려로 재개되어 다리오 1세 제6년(주전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다(스 6:15).
2차 귀환(에스라, 전통적으로 주전 458년): 아닥사스다 왕 제7년(스 7:7-8)에 에스라가 교사이자 제사장으로서 귀환했다. 아닥사스다를 아닥사스다 1세(주전 465-424년 재위)로 보는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이는 주전 458년에 해당한다.
3차 귀환(느헤미야, 주전 445년): 아닥사스다 왕 제20년(느 2:1)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총독으로 파송되어 성벽을 재건했다. 같은 아닥사스다 1세를 기준으로 하면 이는 주전 445년에 해당한다.
2. 전통적 견해: 에스라(458년) 선행, 느헤미야(445년) 후행
이 전통적 연대기는 두 가지를 전제한다. 첫째, 에스라 7:1-8과 느헤미야 2:1의 "아닥사스다"가 동일 인물(아닥사스다 1세)을 가리킨다는 것. 둘째, 에스라 7장의 "제칠년"이 느헤미야 2장의 "제이십년"보다 시간상 앞선다는 것 — 이는 두 본문의 문자적 순서(에스라서가 느헤미야서보다 먼저 배치됨)와도 일치한다.
이 견해의 강점은 본문의 표면적 순서와 적 배열을 그대로 존중한다는 점, 그리고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함께 활동하는 것으로 보이는 몇몇 장면(느 8:9, 12:26, 12:36 —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나란히 언급됨)을 자연스럽게 설명한다는 점이다.
3. 소수 견해: "에스라 후행" 가설의 근거
그러나 20세기 이래 상당수 학자들(존 브를 비롯해 여러 역사학자들이 진지하게 검토)이 전통적 순서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이 소수 견해(에스라의 도착을 느헤미야보다 뒤로, 혹은 최소한 느헤미야의 활동 후반부와 겹치는 시점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본문 내적 부자연스러움: 만약 에스라가 458년에 이미 와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면, 왜 느헤미야가 445년에 도착했을 때 예루살렘 성벽이 여전히 황폐한 상태이며(느 1:3, 2:13-15) 성 안에 인구가 매우 적은 것으로 묘사되는가(느 7:4)? 에스라의 개혁이 실제로 성공적이었다면 이러한 방치 상태가 13년이나 지속되었다는 것이 설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상호 언급 부족: 두 인물의 회고록(1인칭 자료) 각각은 놀랍게도 서로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느헤미야 회고록(느 1-7장, 13장)은 에스라를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에스라 회고록(스 7-9장) 역시 느헤미야를 언급하지 않는다. 둘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느 8, 12장)은 모두 3인칭 편집 서술 구간에 속한다 — 이는 최종 편집자가 두 인물을 적으로 연결시켰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실제 역사적 동시대성에 대해서는 회고록 자체가 침묵한다는 것이다.
- 아닥사스다 2세 가설: 이 소수 견해의 한 형태는 에스라 7:1의 "아닥사스다"를 아닥사스다 1세가 아니라 아닥사스다 2세(주전 404-358년 재위)로 재해석하여, 에스라의 "제칠년"을 주전 398년으로 늦춘다. 이 경우 에스라는 느헤미야(445년 도착, 이후 여러 차례 왕래)보다 반세기 가까이 늦게 활동한 것이 된다.
- 사회적 개혁의 순서: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느헤미야의 사회·경제 개혁(느 5장의 빚 탕감)이 먼저 이루어져 공동체의 물리적 기반(성벽, 인구 재배치)이 안정된 후에야 에스라의 종교·율법 개혁이 의미 있게 작동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회사적 논리를 제시한다.
4. 학계의 균형 잡힌 평가
이 논쟁에 대해 정직하게 말해야 할 것은, 결정적으로 어느 한쪽을 입증하는 외적 증거가 아직 없다는 사실이다. 엘레판티네 파피루스(주전 5세기 말 이집트 유대인 군사 식민지의 아람어 문서)는 느헤미야 이후 시대에 대제사장 요하난과 총독 바고아스를 언급하여 페르시아 시대 후반부 유다의 행정 구조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에스라의 연대를 직접 확정해 주지는 못한다.
현재 학계의 지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전통적 견해(에스라 458년 선행)는 여전히 다수설이며 대부분의 보수적 주석가와 상당수의 비평학자들도 지지한다 — 본문의 표면적 순서를 존중하고, 두 회고록의 상호 침묵을 "각자의 회고록 장르가 자신의 사역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라는 문학적 설명으로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 (2) "느헤미야 선행" 내지 "에스라 후행" 가설은 소수설이지만, 존 브라이트 등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진지하게 옹호했으며 본문 내적 긴장(성벽 방치 상태의 지속)에 대한 나름의 설명력을 지닌다. (3) 절충적 견해로, 두 인물이 대체로 동시대에 활동했으되 회고록 각각이 자신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서로를 상대적으로 덜 언급했을 뿐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이 강의의 목적은 어느 한 편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지하고 미해결된 학문적 논쟁이라는 사실 자체를 정직하게 인식시키는 데 있다. 학생이 34-35장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별 사역을 배울 때, 두 사람의 정확한 상대적 순서에 대한 불확실성이 각 인물의 신학적 메시지(성전과 율법의 회복, 성벽과 의 갱신) 자체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 연대기적 불확실성과 신학적 확실성은 서로 다른 층위의 문제다.
| 귀환 | 인솔자 | 페르시아 왕(전통적 견해) | 연대(주전, 전통설) | 주요 사역 |
|---|---|---|---|---|
| 1차 | 스룹바벨·예수아 | 고레스 | 538년경 | 귀환, 성전 재건 시작(516년 완공) |
| 2차 | 에스라 | 아닥사스다 1세 제7년 | 458년(전통설) / 398년(소수설, 아닥사스다 2세) | 율법 교육, 혼합 결혼 개혁 |
| 3차 | 느헤미야 | 아닥사스다 1세 제20년 | 445년 | 성벽 재건, 사회 개혁, 언약 갱신 |
| 쟁점 | 전통적 견해(에스라 선행) | 소수 견해(에스라 후행) |
|---|---|---|
| 본문 순서 | 정경 배열(에스라서→느헤미야서)과 일치 | 정경 배열은 신학적 재배치로 봄 |
| 성벽 방치 문제(느 1-2장) | 에스라의 개혁이 종교 영역에 국한, 성벽은 별개 사안 | 에스라가 아직 오지 않았기에 방치 상태가 자연스러움 |
| 회고록 간 상호 침묵 | 각 회고록 장르의 초점 차이로 설명 | 실제 비동시대성의 증거로 해석 |
| 아닥사스다 정체 | 아닥사스다 1세(주전 465-424년) | 아닥사스다 2세(주전 404-358년) 가능성 제기 |
| 학계 지형 | 다수설 | 소수설이나 진지하게 옹호됨(브라이트 등) |
In short
- 포로귀환은 스룹바벨(주전 538년경), 에스라(전통적으로 주전 458년), 느헤미야(주전 445년)의 세 차례로 구성되며, 스룹바벨의 성전은 주전 516년에 완공되었다.
-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상대적 도착 순서는 진지한 학문적 논쟁거리다 — 전통적 견해(에스라 458년 선행)가 다수설이나, 성벽 방치 상태의 지속과 두 회고록의 상호 침묵을 근거로 "에스라 후행"(아닥사스다 2세 기준 주전 398년경) 가설을 제기하는 소수 견해도 진지하게 논의된다.
- 이 논쟁을 결정적으로 해소할 외적 증거는 현재까지 없으며, 학생은 이를 미해결된 학문적 쟁점으로 정직하게 인식해야 한다.
- 연대기적 불확실성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각 사역의 신학적 메시지(성전·율법의 회복, 성벽·언약의 갱신) 자체를 훼손하지 않는다.
Reflection and discussion
- 성경 연대기에 대한 학문적 불확실성(에스라-느헤미야 순서 논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것이 성경의 권위나 신뢰성에 대한 여러분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연대기적 불확실성과 신학적 메시지의 확실성을 구분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의 황폐함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다"(느 1:4)는 반응은, 에스라의 선행 개혁 여부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깊은 목회적 감동을 준다. 오늘 우리는 우리 공동체나 사회의 "무너진 성벽"에 대해 이런 애통함을 갖고 있는가?
- 두 회고록(에스라, 느헤미야)이 서로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같은 시대 같은 공동체를 섬긴 두 사역자가 반드시 서로의 사역을 상세히 기록해야 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이것이 오늘날 협력 사역에서 "인정받음"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 어떤 성찰을 제공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