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iculumCH301 한국교회사 › 제3장 개신교 선교의 태동

3-1강 개항과 근대 조선의 문호 개방

5 min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거치며 굳게 문을 걸어 잠갔던 조선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서서히 근대 국제 질서 속으로 편입됩니다. 이 강의는 개항의 과정과 그것이 이후 개신교 선교에 미친 영향을 살펴봅니다.

What these 5 minutes give you

  • 병인양요·신미양요 이후 조선의 대외 정책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 강화도조약(1876)과 이후 서양 각국과의 수교 과정을 진술할 수 있다.
  • 개항이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여는 데 미친 간접적 영향을 이해할 수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갈라디아서 4:4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문을 열어 놓았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요한계시록 3:8

쇄국의 정점과 균열의 시작

앞 장에서 살펴본 병인박해(1866)와 병인양요, 그리고 이어진 신미양요(1871, 미국 함대의 강화도 침공)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정점에 이르게 했습니다. 대원군은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며 "서양 오랑캐와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강경한 입장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무력 충돌의 경험은 조선 지배층 내부에서도 서구의 군사력과 문물에 대한 현실적 인식을 촉발시켰고, 이는 훗날 개항론이 힘을 얻는 배경이 됩니다.

강화도조약과 개항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대외 정책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해역에서 조선군과 충돌한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이듬해인 1876년 조선에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의 체결을 강요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으로, 부산·원산·인천의 개항, 치외법권 인정 등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이어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 등과도 잇달아 수교하며 국제 사회에 편입되어 갔습니다.

개항이 선교에 미친 영향

개항 자체가 곧바로 선교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비롯한 초기 조약들에는 명시적인 종교의 자유 조항이 포함되지 않았고, 실제로 개신교 선교사들이 공식 입국한 이후에도 상당 기간 노골적인 전도 활동은 신중하게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나 개항은 서양인들의 조선 방문과 체류를 가능하게 하는 법적, 실질적 통로를 열었습니다. 특히 이 강의 이후 다룰 알렌(1884)의 입국이 가능했던 것도 조미수교라는 토대 위에서였습니다. 개항은 곧 선교의 허용은 아니었지만, 선교가 시작될 수 있는 물리적, 외교적 공간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변화하는 인식과 시대의 흐름

이 시기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일어났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는 서구 문물의 적극적 수용을 주장했고,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은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저술한 『조선책략』을 들여왔는데, 이 책은 조선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연대해야 한다는 논리를 담고 있어 개화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러한 변화된 국제 인식은 뒤이어 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는 정치적, 정서적 토양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조선은 이렇게 문을 열어가는 가운데, 동시에 만주와 일본이라는 국경 바깥에서는 이미 한글 성경 번역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선교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다음 강의에서 다루게 됩니다.


사건 연도 내용
신미양요 1871 미국 함대의 강화도 침공, 쇄국정책의 정점
강화도조약 1876 일본과의 최초 근대적(불평등) 조약, 3개 항구 개항
조미수호통상조약 1882 미국과의 수교, 서양 열강과의 잇단 조약으로 이어짐
조선책략 유입 1880 황준헌 저술, 친미 연대론 확산에 영향
개항의 성격 내용
직접적 효과 통상 항구 개방, 서양인 체류 가능
간접적 효과 선교사 입국의 외교적 토대 마련
한계 명시적 종교 자유 조항 부재, 초기 전도는 여전히 제한적

In short

  • 병인·신미양요 이후 쇄국정책이 정점에 달했으나, 이는 역설적으로 개항론이 힘을 얻는 배경이 되었다.
  •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을 맺었고, 이후 서양 각국과 잇달아 수교했다.
  • 개항은 곧바로 종교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았지만, 선교사 입국의 외교적, 물리적 토대를 마련했다.
  • 조선책략 유입 등으로 개화 여론이 확산되며 서양, 특히 미국에 대한 정서적 토양이 마련되었다.
  • 조선이 문을 여는 동안, 국경 밖 만주와 일본에서는 이미 한글 성경 번역이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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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lection and discussion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같은 무력 충돌의 아픈 경험이 오히려 개항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역사적 사건이 뜻밖의 새로운 문을 여는 경우를, 우리 삶이나 신앙의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 개항이 곧 선교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법적, 사회적 문이 완전히 열리기 전에도 하나님의 일하심이 준비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 "때가 차매"(갈 4:4)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때는 여러 정치적, 역사적 사건들이 얽히며 준비된다는 사실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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